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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 폐광지역 문화로 살린다
특별기획 / 폐광지역 문화로 살린다
  • 두메산골
  • 승인 2019.10.02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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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광지역 흥망성쇠의 산증인 김흥식
영월 마차탄광의 삭도
영월 마차탄광의 삭도

 

석탄은 우리나라 근대화에 한 축을 담당했던 중요한 자원이었다. 당시 석탄은 우리나라 전체 가구의 77%가 사용하는 서민용 연료이며 국가 에너지 자원의 안보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자원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국민소득의 향상으로 가스, 석유, 전기 등 고급 에너지에 대한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석탄산업은 급속한 사양길을 걷게 되어 대표적인 탄광촌이었던 태백, 영월, 정선, 삼척 도계 등은 인구의 감소와 함께 경제적으로도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당시 정부도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1986년에 들어서야 석탄산업합리화 정책을 수립하여 폐광지역을 지원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제발전과 함께 소득이 늘어나고 기본적인 생계가 해결되며 국민소득이 1만불을 넘어서면서 폐광지역의 사람들의 삶도 달라지게 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기본적인 생계문제도 있었지만 발전하는 수도권과 타지역과 자신들의 생활상을 비교하면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문화의 소외였다.

문화 소외 현상이 폐광지역의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것은 2000년대 들어서 부터이다. 지역에서 문화활동을 하는 동호회 등을 중심으로 시작된 문화의 현장에서 움직임을 주도했던 사람들을 만나본다.

폐광지역 흥망성쇠의 산증인 김흥식

 

김흥식(64). “탄광 경기가 좋은 60~70년대는 대단했어요. 제가 옥동광업소가 있던 김삿갓면 모운동에 살았는데 그 좁은 동네에 없는 게 없었어요. 미장원, 당구장, 술집 등 산골짜기마다 집이 들어서 인구가 1만 명이 넘었어요”

불과 40 ~ 50년 전의 이야기를 꺼낸 그는 당시를 회상하기라도 하듯 목소리가 힘이 들어간다.

김흥식 씨는 영월군 남면에서 태어나 세 살 적에 광부인 아버지를 따라 모운동으로 들어와 지금까지 살고있는 토박이로 이 마을 이장을 25년이나 한 영월 폐광지역의 산 역사이다.

 

산골 최고의 직장 광부가 되면

60년대를 생각하면 별로 신통한 일자리가 없던 시절이어서 탄광에 광부로 들어가면 쌀배급은 물론 보수도 당시로선 탄광의 사무직보다 많은 지금으로 계산한다면 3백 만원 정도가 되었다. 옥동광업소는 민간 업체로서는 영월에서 제일 큰 광업소로 북면 마차리에 있던 국영기업인 마차광업소와 함께 영월에서 쌍벽을 이루는 탄광이었다.

당시 마차리에는 극장 형태를 갖춘 좌석이 4백석이 넘는 문화관이 있었으며 식당, 술집 등이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광부 일은 쉬운 게 아니었다. 예를 들어 10명이 취업을 하면 남는 사람은 2~3명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옥동광업소가 있는 모운동도 마차리 못지않은 호황을 누려 개도 오백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우스개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영월읍에서 모운동을 하루에 세 번 운행하는 마이크로 버스는 항상 콩나물시루였고 초등학교 학생이 850명으로 수업은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하였으며 중학교 과정에 재건중학교가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면 냇물을 검은색으로 그리기도 하였으며 광업소에서 운영하는 소비조합은 오늘날 백화점처럼 다양한 생필품을 살 수 있어 편리하였다.

옥동광업소는 해발 1,088m 망경대산에 자리하여 2,100m까지 갱도를 뚫어 망경대산을 관통하였으며 채탄한 석탄을 석항역까지 보내는 소래기바가지 삭도는 마을 사람들에게 늘 신기한 대상이었으며 장마철이나 겨울철 폭설 등으로 길이 끊기면 삭도를 이용하여 생필품을 조달하기도 하였다.

빈집이 늘어가는 탄광촌

탄광촌의 호황은 1980년대 들어 소득이 높아지면서 가스, 전기 등으로 에너지가 대체되고 거기에 탄광은 채탄 비용이 늘어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게 된다. 옥동광업소가 문을 닫은 것이 1989년 4월 30일. 광업소가 문을 닫으면서 모운동 마을의 인구는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탄광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떠나면서 빈집이 늘어나고 동네는 활기를 잃어갔다.

이장을 맡고 있던 김흥식 씨는 쇠락해가는 마을을 살리기보다 유지하기 위해 고심하던 중 생각해 낸 것이 마을 담장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다소 황당하기도 하였지만 부인과 함께 담장이 있는 곳이면 그림을 그렸다. 때맞춰 당시 행정자치부에서 시행한 참살기 좋은 마을가꾸기 사업을 지원받아 주민들이 참여하고 모운동은 동화마을로 변모해갔다.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탄 동화마을

마을의 벽화는 사진작가들의 사진 소재가 되어 점점 알려지기 시작하여 방송국에서도 취재를 하여 30여 호의 마을은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처음 방송을 할 때에는 긴장하여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지 못했지만 이후 모방송국에서 진행하는 아침마당이라는 프로에 까지 출연을 하였다.

또 2008년에는 살기좋은 마을 가꾸기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김흥식 이장은 옥동광업소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 것에 대한 향수가 많다. 특히 산과 산을 연결하여 석탄을 나르던 소래기바가지(삭도)와 갱안에서 탄을 실어 나르던 작은 가시랑차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삭도는 이용을 할 수 없어도 하나의 볼거리가 되기에 충분하고 가시랑차는 요즘 유행하는 레일바이크로 활용하면 더 많은 관광객들이 마을을 찾아 동네가 발전하고 주민들의 삶에도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쉽다.

귀농, 귀촌은 유토피아가 아니다

“우리나라 근대화의 원동력이 되었던 석탄산업을 기억하고 폐광지역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만 아직까지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정부의 석탄산업합리화 정책은 이제 종료를 앞두고 있다. 지원이 끝나고 나면 폐광지역은 과연 어떻게 또 변모할까. 김흥식 씨는 2018년 25년의 이장을 사퇴하였다. 자신의 건강 상의 이유가 가장 컸지만 지금도 자나 깨나 모운동을 생각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지금도 마을의 노인들은 조그만 문제가 생겨도 김 이장을 찾는다.

최근 들어 영월에도 귀농, 귀촌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 중에는 성공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실패하고 다시 도시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실패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부분이 마을의 원주민들과 불화가 원인이다. 김 이장은 말한다. “귀농, 귀촌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처음에 와서 하는 일이 측량을 하고 울타리를 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마을 사람들과 담을 쌓는 시작입니다. 울타리를 치면 안됩니다”

김흥식 씨의 말처럼 구농, 귀촌의 성공 비결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자신보다는 마을을 먼저 생각하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여기에 농촌에서 받을 수 있는 각종 교육프로그램에 적극 참여하여 배우고 익히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고 강조한다.

농촌에도 이제는 문화를 생각하고 배우고, 만들어 나가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농촌문화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문화로 만들어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다양한 문화가 농촌을 발전시키고 나아가 사람들의 소득증대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배워야 합니다. 배워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마지막으로 자신과 평생을 같이 해온 모운동이 산꼬라데이 길을 걸으면서 힐링을 할 수 있는 대한민국 힐링 일번지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역량을 모두 바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 본 기획물은 한국언론진흥재단 후원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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