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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돌이마을의 초석 박동희 어르신
삼돌이마을의 초석 박동희 어르신
  • 두메산골
  • 승인 2021.01.28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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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학 마을의 발전을 이야기 할 때면 빠지지 않는 한 사람. 바로 박동희(80) 어르신이다. 물론 마을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마을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지만 여기에 앞장 서서 발전의 교두보를 마련한 사람이 바로 박동희 어르신이다.

어르신은 원래 강림면 월현리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계신 것이다. 햇수로 따지면 73년을 운학에서 사신 것이다. 어르신의 아버님은 할아버님과 함께 이북에 살고 계시다가 8. 15. 해방이 되기 바로 전에 월남하여 월현에 자리를 잡고 농사를 지으셨다. 당시 농촌의 살림살이는 모두가 어려운 보릿고개를 넘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다. 유일한 생계 수단이 농사였기에 사람들은 좀더 농사 조건이 좋은 곳을 찾아 살림살이를 옮겼다.

원래 운학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산골마을 임에도 논이 많아 수주면에서 논이 제일 많았다고 한다. 또한 화전민들이 산에서 화전을 일구기도 했고 6. 25. 전쟁이 일어나자 식구 모두가 피난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인민군이 들어와 피난을 가지 못했고 전쟁 통에 아버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르신은 집안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학교에 가지를 않고 농사일에 전념했다. 덕분에 두 여동생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22세 때 군에 입대하여 위생병으로 비교적 편한 생활을 하며 주로 군인가족들의 진료를 도왔다. 운학리에는 일제강점기에도 마을에 양조장과 도정공장이 있어 다른 농촌보다는 살기가 금 나았으며 어르신 집도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쌀밥을 먹을 정도는 되었다. 당시는 4천평 정도의 농토에서 농사를 지었다.

29세 때 결혼을 하고 어르신은 농한기 때면 소설책 장사를 하였다. 서울 동대문 시장에서 바바리코트 등 옷가지를 가져다 팔아 농한기에도 놀지를 않았다.

또한 마을에 느타리버섯 작목반을 만들어 서울 가락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였으며 버섯이 좋아 서울에서 업자가 직접 운학을 찾기도 하였다.

어르신은 새마을지도자와 마을 의용소방대장을 7년이나 했다. 소방의용대장 당시 재미난 기억은 강원도지사가 성묘를 위해 마을을 찾았을 때 점심식사를 하던 중 도지사에게 옥수수를 대접하면서 마을에 일제강점기 때 사용하던 창고의 보수를 청탁해 그 해 12월에 마을의 출장소로 만들었다. 건축비용은 도비 1억원이었다. 또한 운학초등학교 학생이 120명 정도 되었는데 학교 가는 길에 다리가 없어 바만 오면 황둔으로 가게 되어 마침 국회의원이던 심명보 의원에게 실정을 설명하여 심 의원이 다리를 놓아주어 아이들이 편하게 학교를 오가게 되었다. 물론 후에 선거운동을 도와주었다.

당시에는 마을의 이장은 마을 일만 보는 것이 아니라 출장소, 우체국, 학교 등에 어려움이 생기면 발벗고 나서서 도와야 했다. 80년대 들어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998년에 마을회관을 건립하였고 70년대에 들어서면서 화전민들이 모두 떠나면서 마을은 자리를 잡게 되었고 이장을 하면서 느낀 것은 어르신은 친척이 없지만 다른 이들은 친척들이 있어 자기들만 돌아가면서 이장을 해 마을은 발전을 하지 못하고 그냥 그 자리에 머물렀다.

 

이장을 한 번하고 다음번에도 당선이 되어 마을 주변정리를 하고 당시 마을에 귀촌하여 마을의 총무를 보던 안충선 현 이장에게 이장자리를 물려주고 싶었지만 안 총무가 귀촌한지 5년이 되지 않아 자격이 없어 자신의 임기 일년을 남겨놓고 귀촌인들의 추천을 받아 안충선 총무에게 이장을 물려주는 신의 한수를 보였다.

마을 원주민들은 왜 귀촌인에게 이장을 시키느냐, 불평이 많았지만 어르신은 당신들이 할 때는 마을의 발전이 안되었고 향후 변화되는 마을을 확신한다며 안 충선 이장을 적극적으로 밀어주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봐도 당시 자신이 옳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어르신은 이장을 할 때는 물론 이장을 넘겨준 다음에도 안 이장이 하는 일에는 앞장서서 도와주었으며 마을로 이주하는 귀촌인들에게도 먼저 손을 내밀어 그들의 정착을 도와주었으며 그들에게 마음을 열고 소통의 폭을 넓혀나갔다.

또한 귀촌인들에게 마을 일을 맡겨 원주민들과 소통을 하게하여 텃세가 없는 운학을 만들었다. 불평을 하던 마을 원주민들도 결과적으로 마을에 발전이 눈에 보이고 귀촌인들의 솔선하는 모습에 마음을 열게 되었다.

어르신은 평소에 “잘하는 것은 밀어주고 못하는 것은 탓하지 말고 기회를 주자”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운학에 귀촌인들이 많은 것은 풍광이 좋은 것은 물론 사람들끼리 소통과 협조가 잘 된다는 것이 특징이다. 영월군의 오지로 여겼던 운학리는 이제 “박힌 돌, 굴러온 돌, 굴러올 돌”을 표방하는 삼돌이 마을로 강원도는 물론 전국에서도 드물게 귀촌 성공 마을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운학리의 귀촌인 비율은 80%에 이르고 있으며 이장이 앞장서서 여러 지원사업으로 마을을 전국 일등 마을로 만드는데 박동희 어르신의 초석 다지기가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박동희 어르신이 보는 마을의 발전은 우선 마을이 단합이 잘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도 어르신의 소통과 마을 사람들의 높은 참여가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근래에 들어 눈에 띄게 늘어나는 귀촌인들에게도 마을의 소통과 단합을 먼저 알려주고 제일 중요한 것은 욕심을 버리고 리더를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싶다.

운학은 산동네가 거의 전부다. 겨울철 눈이 오면 마을 사람들 모두가 자기 집 앞 보다는 마을 길 등을 먼저 치우고 그 다음에 자기 집 앞을 치우는 나를 내려놓고 먼저 다가가는 마음가짐에 삼돌이 마을의 미래는 밝기만 하다.

박동희 어르신은 80세가 넘은 연세에도 농사일에 손을 놓지 않고 있다. 넓은 농토를 짓지는 못하지만 어릴 적부터 몸에 밴 부지런함과 땅을 사랑하는 마음은 나이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 어르신의 철학이다. “인생은 별거 아니야 나를 내려놓고 내가 먼저 다가가고, 더불어 살면 인생은 성공한거 아니야...”하시는 모습에서 운학 사랑과 사람들을 사랑한 한 평생을 읽을 수 있다.

가을 논에서 벼를 수확해 볏단을 안고 흐뭇해 하고 손자 손녀들의 커가는 모습에 보람을 느끼지만 금년에는 코로나로 인해 추석 명절에 손자 손녀를 볼 수 없어 아쉬워 하신다. 돌아보니 삶은 처음부터 백지와 같았다. 채우고 채울수록 비워지는 것이 삶이었다. 비우고 비워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사람이 힘이고 사람만이 행복이다. 행복은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끈한 마음에 있다. 우리는 모두 사람 때문에 행복하고 사람 때문에 불행해지기도 한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돈보다 사람이다. 사람이 있어야 돈이 있고 권력이 있다.

인생 80에서 박동희 어르신이 모두에게 남겨주고 싶은 한마디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소통이라는 한마디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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