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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삼돌이 마을의 농부, 이제는 박힌 돌이다” 유병국 박사
“나는 삼돌이 마을의 농부, 이제는 박힌 돌이다” 유병국 박사
  • 두메산골
  • 승인 2021.01.27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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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는 살 수 있어도 시간은 살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시간은 세 가지 걸음걸이를 가지고 있다. 주저하면서 다가오는 미래, 화살처럼 지나가는 현재, 그리고 멈춰 서서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과거가 그것이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면서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는 사람. 유병국(72) 박사가 그 사람이다.

유 박사는 1999년 무릉도원면 운학1리(삼돌이마을)로 귀촌하여 2000년에 집을 짓고 올해로 22년째 삼돌이마을에서 농사와 동호회 활동, 영월의료원 자원봉사 진료 등 일년 365일을 잘 짜여진 그물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유병국 박사는 서울토박이로 9남매 중 일곱째,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진학을 앞두고 본인은 어렸을 적부터 꿈꿔왔던 농과대학 진학을 원하였으나 집안 식구들의 종용으로 의과대학으로 진학하여 의사의 길을 가게 되었다.

독실한 가톨릭교도인 유 박사는 대학을 마치고 성모병원에서 피부과의사로 15년을 근무하면서도 마음속에는 항상 농토와 자신이 키워내는 농산물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가운데 경기도 하남시에 조그만 농토를 마련해 틈나는 대로 농사를 지었다.

15년의 성모병원 근무를 마치고 경기도 성남시에서 병원개업을 하여 성모병원 근무 때보다 더 바쁠 정도로 병원은 잘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개인병원은 더욱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 것을 느끼면서 흙냄새가 풍기는 땅과 농사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커져만 갔다. 마침내 병원을 정리하고 그토록 자신이 원하던 농촌으로 가기 위해 땅을 알아보던 중 홍천과 영월 운학을 놓고 고민하던 중 겨울에 찾은 영월 무릉도원면 운학1리가 마음에 들어 바로 계약을 한뒤 1999년 운학으로 들어왔다.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농촌생활이었지만 귀촌 하면서 4년 동안은 사정이 있어 혼자서 생활을 하였다. 귀촌 1년 동안은 그동안 나빠졌던 건강을 회복하는 기간이었지만 혼자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않좋은 상황에서도 조금씩 농사일을 하였다. 그러나 4개월이 지나자 본인도 놀랄 정도로 건강이 회복되었다.

처음 3개월이 지나자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자신과 접촉을 했다. 여기에도 유 박사 만의 독특함이 있었다. 당시 마을에서는 유 박사를 제일 부지런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동네 사람들이 아침 일찍 나와 보면 언제나 유 박사가 나와 일을 하고 있었다. 유 박사가 귀촌한 당시 운학마을에는 3년 전에 전기가 들어왔을 정도로 낙후된 곳으로 유 박사 집에 심야전기보일러를 켜면 마을에 전기가 모자랄 정도였다.

또한 자동차를 가지 있어 마을 사람들이 아프거나 급히 병원을 가야할 상황이면 유 박사가 운전을 하여 병원으로 가는 자칭 마을 119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마을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유 박사가 마을에서는 처음으로 트랙터를 구입하자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곳의 농토는 경사지이고 돌이 많아 트랙터가 불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마을 사람들의 잘못된 견해였다. 이후 트랙터 덕분에 마을 사람들과 더욱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트랙터로 밭을 갈아주면 밭주인은 유 박사의 농토에 잡초를 제거해주는 품앗이를 해주어 마을 사정은 물론 사람들과 친밀감도 깊어졌다. 비로소 농부가 된 것이다.

마을에는 네 것 내 것이 없을 정도여서 연장을 빌려가면 망가지고 하는 것들이 처음에는 힘들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도 거기에 동화되어 어느 순간에 남의 집 부엌에서 식사를 하기도 하였다. 유 박사는 농사를 지으면서 오리, 사슴 등을 키우기도 했다.

또한 마을에는 겨울이면 농한기로 도박이 성행하였는데 마을에 교회가 생기면서 목사님 덕분에 줄어들었으나 목사님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을 떠나 혹시 목사님이 도박을 없애기 위해 당국에 신고한 것이 아니냐는 뒷얘기가 무성했다.

그 때부터 유 박사는 사냥총을 겨울이면 꿩 사냥을 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소일거리를 마련해주기도 하였다. 당시 50가구가 채 안되었던 마을에는 농토에 돌이 많아 경운기도 한 대가 없었는데 박 영감님이 처음으로 경운기를 구입하여 논농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운학에는 담배 농사를 많이 지어 수익성이 높아 그렇게 가난하지는 않아 사람들 간에 사이가 좋았으나 언제부터인가 품앗이가 없어지고 돈을 주고 받는 문화가 생기면서 일을 해주면 인건비를 주어 마을 인심이 개인주의화가 되었다. 농사 첫해 농사는 5천평의 농토에서 6백만원의 매출을 올렸으나 유 박사는 손익을 따지지 않고 자신이 가꾼 농토에서 적자지만 수익을 올렸다는 사실에 뿌듯했다.

귀촌 4년이 지나고 그동안 서울과 운학을 오가며 살림을 돌봐주던 부인 김혜경씨가 아주 운학으로 오면서 유 박사의 농촌생활은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유 박사가 서울에서 주말이면 봉사를 하던 때 같이 봉사했던 수녀님이 안동으로 오셔 오랜만에 반갑게 만났으며 그 수녀님이 주선을 하셔 가톨릭 안동교구 주교님이 운학으로 유 박사를 찾아왔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그것은 한국전쟁 때부터 영주 다미안피부과 병원에서 한센병 환자를 돌보던 벨기에 수녀님이 연세가 90세가 되어 병원을 주교님께 넘겨 유 박사에게 그 병원을 맡아 운영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처음 일년만 운영을 부탁하였으나 그것은 10년 세월의 시작이었다. 당시 운학에서 영주까지는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이어서 3시간을 걸려 출근을 하고 또 3시간을 걸려 퇴근해야 했다.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시간은 줄었지만 출퇴근 길은 힘들기만 했다. 당시 영주 인근에는 7개의 한센병 환자촌이 있어 80여 명의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거기에 일반 환자들까지 몰리자 자신과 같은 피부과 의사인 부인 김혜경씨에게 도움을 청해 부부가 환자를 진료하였다.

영주 병원을 맡으면서 마을과는 소원해졌으나 유 박사는 이때 에도 새벽 4시에 일어나 농사일을 하였다. 병원에 한센병 환자들이 줄어들고 일반 환자들을 주로 진료하던 중 ‘울지마 톤즈’로 알려진 이태석 신부가 돌아가시자 유 박사는 주교님께 자신이 그곳으로 가겠다고 지원을 하여 영주 병원을 정리하고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로 가서 그곳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보통 섭씨 40도가 넘는 날씨와 판자촌으로 이루어진 도시 등 그곳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다.

특히 남수단은 내전으로 상황이 불안해 톤즈에서 케냐로 갔다가 잠비아로 가야했다. 아프리카 생활 중 한국에 다니러 왔다가 고교 동창을 만나 그곳에 사정을 이야기 하자 마침 건축 일을 하던 그 동창은 현지에 학교를 지어주는 등 봉사를 하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그곳에서 눈을 감았다. 당시 그 동창의 운구가 참으로 어려웠던 기억이 있다. 유 박사는 아프리카에서도 그곳 사람들에게 농사를 가르쳐 주어 야채를 자급자족하는 등 생활의 변화를 가져다 주기도 했다.

3년 간의 아프리카 생활을 마치고 2015년 운학으로 돌아온 유 박사는 실로 오랜만에 자기 자리를 찾은 것에 감사하면서 농사일에 전념하고 마을 일에도 전보다 더 열정적으로 참여하였다.

한번은 부인 김혜경씨가 고관절 부상을 입어 영월의료원 정형외과를 찾았는데 담당 의사가 상당히 유 박사의 눈에 낯이 익어 어디서 만났던가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유 박사가 군 시절 의무중대장으로 근무할 당시 군의관으로 있었던 고한석씨로 오랜만에 반가움을 나누었고 이후 영월의료원 원장이 도움을 청해 주 1회 진료를 도와주었다가 2019년부터는 주2회로 월요일과 목요일에 영월의료원 피부과에 진료봉사를 하고 있다. 유 박사는 바쁘게 사는 삶이지만 매주 화요일 성당에서 하는 재가복지를 10년 넘게 하고 있으며 수요일에는 기도모임, 목요일에는 의료원 진료를 마치면 대평소를 배우는 등 봉사와 나눔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유 박사는 마을 일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야생화에 조예가 깊은 지인과 함 께 마을에 야생화동아리를 만들어 매주 월요일 새벽에 모임을 하고 있으며 영월의 동강 할미꽃도 자신이 씨를 받아 꽃을 피워 보급하였으나 사람들이 보고가기만 하면 좋은데 그것을 뽑아가 안타깝기만 하다. 유 박사는 산 하나를 식물원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새 아이템에 도전하기를 꺼려하는 농민들을 보면서 자신이 키웠던 곤드레에 이어 눈개승마를 재배하고 있으며 야생화 동호회와 어수리 재배 등을 시작하였으나 아직은 수익성이 낮지만 멀지 않은 장래에 빛을 보는 것에 의심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성공하면 마을 전체에 수익사업이 될 것이다.

유 박사는 아는 목사님에게 플륫과 색소폰을 배워 배운지 3개월만에 교회에서 공연을 한적이 있었는데 30명 앞에서 하는 공연인데도 어느 큰 무대 못지않게 긴장이 되었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풍물패에 참여하고 있으며 서각을 배워 거의 작가의 경지에 이른 작품들이 집 벽에 걸려있다. 서각하면 떠오르는 기억은 자신이 마을 집집마다에 문패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이것은 우편 집배원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한 배려였다.

유 박사는 운학1리가 특색있는 마을이 되기를 원하고 자신도 거기에 열정을 바친다. 특히 요즘은 마을에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어도 서로 모르는 사람이 많고 심지어는 마을 이장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 운학1리 학산천마을은 ‘박힌 돌, 굴러 온 돌, 굴러올 돌’로 알려진 삼돌이 마을로 영월에서는 제법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마을이지만 주말에만 다녀가는 굴러올 돌들이 삼돌이 마을에 녹아들어 함께할 수 있는 날을 기대한다.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살아 온 삼돌이 마을은 유 박사에게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보다도 더 소중하고 애정을 쏟고 싶은 마을이다.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열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유병국 박사에게 무한한 존경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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