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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81년, 운학 81년. 한상원 어르신
인생 81년, 운학 81년. 한상원 어르신
  • 두메산골
  • 승인 2021.01.28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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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한 자리에서 출생하여 평생을 한 집에서 살기는 힘들다. 운학에서 태어나 81년 동안 한 집에서 살아오신 한상원(81) 어르신. 어르신은 지금도 혼자 3천여 평의 농사를 지으면서 건강하고 편안한 삶을 이어가고 계신다.

“나는 평생 농사를 천직으로 생각하고 부지런함이 몸에 배어 있어 농사일이 힘들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어”라고 말씀하시는 한상원 어르신은 부친이 일제강점기에 운학으로 이주, 농사를 지으셨으며 자신은 운학초등학교를 마치고 주천중학교에 입학, 주천에서 하숙을 하였다. 하숙비는 쌀4말. 당시로서는 큰 부담이었다. 주말이면 집으로 와 농사일을 돕고, 2학년 여름방학을 마지막으로 학교생활을 마쳤다.

어르신은 어머니가 어렸을 때 돌아가셔 기억이 없고 아버님은 1951년 전쟁 중에 장티푸스로 돌아가셔 큰 아버지 밑에서 성장하였다. 6. 25. 전쟁 때 피난을 가기 위해 한치재까지 갔다가 돌아와 보니 이미 인민군이 마을에 들어와 있어 피난을 가지 못하고 마을에 머물렀다. 어르신의 부친은 제법 많은 재산을 가지고 계셨으나 돌아가신 후 큰 아버지가 소장사를 하시면서 도박으로 모두 날려 농사를 짓다 19세에 결혼을 하고 처가에서 살았다. 부인은 어르신과 동갑나이에 생일달도 같아 천생연분으로 지금까지 백년해로를 하고 있다.

22세때 군에 입대할 당시 딸이 둘 있었고 제대 후 아들 둘을 얻어 슬하에 4남매를 키웠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 자녀들 공부를 시킨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아들 둘은 모두 대학 공부를, 딸들은 중학교를 나왔다.

현재 장남은 영국에서 살고 있고 작은 아들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으며 딸들 모두 서울에서 잘 살고 있다.

원래 우리네 가정은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과거에는 장남을 공부시켜 놓으면 아래 동생들을 장남이 거두는 정서였다. 어르신의 장남은 제법 큰 회사의 영국지사에 근무하다 회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그대로 영국에 자리를 잡았으며 손녀가 영국에서 의사를 하고 있다.

어르신은 마을일에도 이장을 8년이나 하셨고 체육관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했던 시절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두 번, 새마을지도자 등을 하시는 등 마을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마을은 60년대 60가구 정도가 있었으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대처로 나가고 40여 가구가 남아있었고 살림이 어려운 사람들은 독을 굽는 옹기막에서 살기도 했다. 원래 운학은 원주와 가까워 생활권이 원주에 속해 있었으나 지금은 도로 사정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일반 교통수단은 약간의 불편이 따르고 있다.

운학에는 1965년부터 외지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해 지속적으로 귀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지금은 원래 살던 가구보다 귀촌한 가구가 훨씬 많아졌다.

어르신은 몇 해 전 까지만 해도 담배농사를 지어 지금도 집에 담배건조장이 남아있다. 담배 농사는 수입은 일반농사 보다 나았으나 너무 힘이 들었다. 특히 과거에는 서로 품앗이를 해가며 농사를 지었으나 어느 때 부터인가 돈을 주고 사람을 부리면서 품앗이가 사라져 각자가 자기 농토만 농사를 짓고 있다.

마을은 박동희 이장 시절부터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여 지금의 안 이장이 맡고 부터는 눈에 띄게 마을이 달라지고 있다.

어르신이 말하는 마을의 발전은 좋은 사람들이 귀촌을 한 것이 주요 원인이고

특히 귀촌한 사람들과 원주민들이 마찰이 없이 원주민들이 귀촌한 사람들을 따듯하게 대해주고 귀촌인들도 과거에 자기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것을 모두 버리고 마을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앞장서는 것이 소통과 화합의 결과로 나온 것이라고 한다.

 

부인 김병길 어르신의 말에 의하면 어렵던 시절 아이를 업고 쌀 6말을 머리에 이고 원주로 팔러 나갔으나 쌀이 좋지 않아 팔지 못해 다시 20리를 걸어 황둔에서 겨우 팔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하신다.

현재 당뇨와 심장병으로 고생하시는 김병길 어르신은 함흥태생으로 해방 전에 남쪽으로 내려오셨고 원래는 할아버지가 연변에서 면장을 지내시기도 했다. 월남해서는 평창 봉평 흥정리에서 사시다가 결혼하면서 운학으로 오셔서 지금까지 한상원 어르신과 백년해로를 하고 계시는 것이다. 운학에서 어머니회 회장을 5년이나 하셨을 정도로 활동적이셨고 특히 60~70년대 산아제한 계몽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하셨다.

자식들이 자주 찾아뵙냐는 물음에 어르신 내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시며 큰 아들은 영국에서 살아 아주 가끔 전화를 해오고 작은 아들은 직장생활에 자주 오지는 못해도 이번 추석에 손자 손녀들을 만날 것을 코로나로 인해 볼 수 없어 안타깝다.

한상원 어르신은 그래도 힘은 들었지만 담배농사 20년이 자식들을 키우고 공부 시킬 수 있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지금도 당시 담배나무에서 나오는 독한 진액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다고 하시면서 자신은 농사가 몸에 밴 평생을 살아 지금도 부인의 잔소리에도 아침이면 밭으로 나가신다. 물론 건강하시니까 농사일을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새마을 지도자 시절 마을사람들이 힘을 합쳐 마을길을 닦고 마을의 변화를 이끌었던 시절을 자주 말씀하셨다.

81년을 운학에서 사시면서 가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 아쉬움도 있지만 아직까지 건강하게 땅과 함께 사는 것에 무한한 감사를 느끼시며 땀을 흘리는 만큼의 댓가를 받지 못하는 때도 있었지만 내일 해가 다시 떠오르듯 땅에 대한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행복은 종착지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순간순간 만나는 것이다. 한상원 어르신은 마지막으로 “사는 동안 힘든 적도 많았지만 내가 결정한 것들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서두르지 않고 기다리며 천천히 살아가면 세상도 보이고 내가 서있는 자리도 확실하게 보였다”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삶의 최고의 가치는 땅에 흘린 땀방울이라고 하신다.

운학 마을의 변화와 발전은 귀촌인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거기에 진솔하고 리더십이 강한 지도자의 역할이 컸다면서 자신보다는 마을을 먼저 생각하고 변화와 발전을 앞에서 리더가 이끌면 그 뒤에서 힘을 합쳐 밀어주는 주민들의 노력과 땀이 오늘을 만들었다고 하면서 지금 자신은 나이가 들어 많은 도움을 주지는 못하지만 마을과 같이 호흡하고 보폭을 맞추고 있다고 하셨다.

81년이라는 긴 세월을 운학의 땅과 함께 살아오신 한상원 어르신의 삶은 우리 농촌에서도 아주 드물게 볼 수 있는 외길 인생이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믿는 것이고, 나를 사랑하는 것이고, 나에게 확신을 갖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열심히 살다 보면 다 지나간다. 세상이 아무리 나를 아프게 하여도 내가 나를 아프게 해서는 안된다. 성공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자신의 일을 즐기며 했을 뿐이라는 것 이외에는 다른 아무 이유가 없다. 포기하지 않고 나를 찾아가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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