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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일대기
김삿갓 일대기
  • 두메산골
  • 승인 2018.01.18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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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와 해학과 풍류기행으로 주유천하한 방랑시인

 

김삿갓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하는 유행가가 나온 지도 이미 60년이 넘었다. 이처럼 김삿갓이 숱한 전설과 일화를 남기며 방랑하던 풍류시인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아직도 그의 본명을 모르는 사람이 많고, 더군다나 그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 무슨 까닭에 한평생 방랑을 했으며, 언제 어디에서 세상을 떠나 어디에 묻혔는지 모르는 사람은 더욱 많다.

삿갓으로 하늘을 가리고 죽장 짚고 미투리 신고 한평생을 떠돌아다닌 천재시인 김삿갓, 풍자와 해학과 기지로 어우러진 파격적 시풍(詩風), 보통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기행(奇行)으로 가는 곳마다 전설을 남기고 사라진 방랑시인 김삿갓, 그는 바람처럼 구름처럼 물결처럼 이 땅의 산수와 저자 간을 마음대로 넘나든 영원한 자유인이요 풍류가객이었다.

김삿갓이 평생을 해학과 풍자로 방랑하던 풍류시인이며 기인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한 점 뜬구름 같고 한줄기 바람 같았던 그의 기구하고 불행했던 한 삶의 자취를 똑똑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만큼 그의 일생은 널리 알려진 명성과는 달리 신비에 싸여 있어 강원도 영월 땅에 그의 일가가 숨어살던 집터가 있고, 김삿갓의 묘도 그 근처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도 불과 33년 전인 1982년 10월이었다.

이는 오로지 영월의 향토사학자였던 고 박영국(朴泳國)씨의 오랜 현장답사와 자료를 통한 연구의 결실이었다. 박씨는 1974년부터 김삿갓의 발자취를 추적하기 시작하여 1982년 10월에 마침내 영월군 하동면 와석1리 노루목에서 김삿갓의 묘와 어둔리 선락골의 집터를 찾아냈을 뿐 아니라, 그 뒤 1994년 세상을 뜰 때까지 사재까지 털어가며 김삿갓 유적지 보존운동을 벌이고, 곳곳에 묻혀 있는 김삿갓의 미공개 시와 일화를 발굴해내는 데에 심혈을 쏟았다.

필자가 박씨와 함께 처음으로 김삿갓 묘와 집터를 답사한 것은 한국일보사 기자였던 1984년 여름이었다. 그때 이미 오래 전에 폐가가 되어버린 김삿갓의 집터에서 그의 어머니와 부인과 며느리 등 여인 3대가 눈물과 한숨을 섞어 곡식을 빻았을 디딜방아를 발견하여 가슴이 뭉클했던 기억이 새롭다. 또 그날 영월군청에서 지프를 빌려 김삿갓 유적을 찾아가는데, 너무나 산길이 험악해 머리에 혹이 여러 개 생겼던 것도 추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은 그때 길 같지도 않던 7km의 진입로가 매끈한 아스팔트 포장길로 변했고, 행정구역 하동면은 김삿갓면으로, 골짜기 이름도 와석리계곡에서 김삿갓계곡으로 바뀌었으니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는 느낌이다.

김삿갓은 무슨 까닭에 방랑시인이 되어 고달픈 심신을 이끌고 이 땅의 산굽이며 물줄기를 이리저리 휘감아 도는 풍류행에 나서게 되었을까.

박영국씨 생전에 필자가 들은 바에 따르면 그가 김삿갓의 인품에 매료된 것은 다음과 같은 비화를 발굴한 다음이었는데, 그 일화는 평안도 출신 최용현이란 분에게 들었다고 했다. 최씨의처조부 김대명이란 분은 서당 훈장으로서 늘 필사본 김삿갓시집을 애지중지하며 학동들에게 소개해주곤 했다. 하루는 훈장이 김삿갓에 관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언젠가 평안도 가산읍 다복동에 삿갓 쓰고 죽장 짚고 남루를 걸친 나그네가 찾아와 마을을 둘러보더니 사람들에게, “내가 바로 김 아무개의 손자 병연(炳淵)이요!”하고 자신의 신분을 밝히더니 땅을 치며 한바탕 대성통곡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다복동이 어딘가. 바로 홍경래(洪景來)가 군사를 일으킨 곳이요, 그로 말미암아 김삿갓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치욕스럽게 항복하고 모반죄로 처형당했으며, 그 때문에 집안이 망했고, 김삿갓 자신은 본명을 감춘 채 한평생 방랑길에 나서게 만든 운명의 장소가 아니었던가. 김삿갓은 그러면서도 떠날 때까지 홍경래에 관해서는 일언반구 원망도 비난도 하지 않아 모두가 그의 탈속한 인품과 넓은 도량에 감탄했다는 것이다. 김삿갓은 무슨 까닭에 다복동에 찾아가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던 본명을 가르쳐주고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을까.

평안도 용강 사람 홍경래가 썩은 세상 둘러엎고 새 세상을 만들겠다며 무리를 모아 떨쳐 일어난 것은 순조 11년(1811), 조선왕조 개국 이래 23왕 418년 동안 내내 멸시당하고 천대받아오던 서북 사람들의 원한과 울분이 마침내 홍경래라는 당년 32세 젊은 혁명가의 영도 아래 활화산처럼 무섭게 폭발한 것이었다. 당시 김삿갓의 조부 김익순은 선천부사 겸 방어사였다.

홍경래군이 인근 고을을 휩쓸고 선천에 쳐들어왔을 때 겁쟁이 김익순은 반란군에게 항복하고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더 살아보려다 영원히 욕된 이름을 남긴 셈이 되었다. 이듬해 봄, 난이 평정되자 김익순은 모반죄로 처형당하고 그의 집안은 완전히 몰락했다. 이것이 미완의 정치적 혁명가 홍경래와 문학상의 혁명적 이단자 김삿갓 사이에 얽힌 비극적 운명의 사슬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일가는 당대의 세도가문 안동 김씨 일족이라는 덕분에 부계 ․ 모계 ․ 처계 등 삼족을 멸하는 화는 면했지만 역적의 자손이라 고향에서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때 김삿갓은 겨우 다섯 살짜리 철부지였다.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 순조 7년(1807) 3월 15일에 김안근(金安根)과 함평 이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은 병하(炳河), 아우는 병호(炳湖). 출생지는 분명한 기록이 없지만 만년에 지은 <난고평생시(蘭皐平生詩)>에 ‘어린 시절엔 즐거운 곳이라고 좋아했었네 / 태어나 자란 고향 한북임을 내 아노니(初年自謂得樂地 漢北知吾生長鄕)’라고 하여 한강 북쪽이라는 사실만 알려져 왔는데, 최근 김삿갓 연구자들은 양주군 회천읍 회암리가 그의 고향이라고 밝혀냈다.

집안이 망하자 병하와 병연 형제는 김성수라는 종이 데리고 황해도 곡산으로 도망쳤고, 부모는 아우 병호를 데리고 경기도 광주로 도망쳐 숨어살았다.

2년 뒤 병하와 병연은 아버지가 보낸 사람을 따라 광주로 가서 가족이 다시 합쳐졌다. 아버지는 식솔을 이끌고 양평으로 들어갔는데, 병약하던 막내 병호가 죽어버렸다. 문중에서는 역적이 났으니 가문의 치욕이라면서 족보에서 지워 없앤다는 소리가 나왔고, 그런저런 이유로 쌓이고 쌓였던 수치심과 분노가 울화병이 되어 아버지마저 그만 39세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병연이 일곱 살 때였다.

37세에 과부가 된 어머니는 두 아들을 데리고 경기도 가평을 거쳐 강원도 두메산골로 들어갔다. 평창 미탄에서 조금 살다가 다시 영월 삼옥리로 이사했다. 병하와 병연 형제가 장가를 든 곳이 바로 이곳이고, 김삿갓이 방랑을 떠난 곳도 바로 이 영월 땅이었다.

그런데 <안동김씨대동보>를 살펴보니 공교롭게도 두 형제가 모두 연상의 황씨에게 장가든 것으로 나온다. 형 병하의 부인은 두 살 위인 창원 황씨요, 병연의 부인은 한 살 위인 장수 황씨였다. 병연이 장가든 것은 그의 나이 16세 때였다.

김삿갓은 어찌하여 방랑길에 나섰을까. 최근까지는 김삿갓이 21세 되던 해인 순조 27년(1827) 영월 동헌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할아비 김익순을 욕한 시를 지어 장원한 것이 가출․방랑의 계기라는 설이 정설처럼 굳어져왔었다. 그날 시제(詩題)는 <홍경래난 때 가산군수 정시(鄭蓍)의 충절사를 논하고 김익순의 하늘에 사무치는 죄를 한탄하라>는 것이었다. 이날 장원은 삼옥리에 사는 가난한 선비 김병연이 차지했다. 병연이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에게 자랑했지만 기뻐할 줄 알았더니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눈물을 펑펑 쏟으며 그동안 숨겨왔던 집안의 내력을 일러주는 것이었다. 병연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역적의 자손인 데다 그 할아비를 욕하는 시로 상까지 탔으니 어찌 하늘을 쳐다보며 살 수 있으랴. 그래서 삿갓으로 하늘을 가린 채 정처 없는 방랑길에 나섰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리에 맞지 않는다. 비상한 천재였던 김병연이 나이 스물이 되도록 치욕스러운 집안의 내력을 전혀 몰랐을 리가 없다. 할아비가 역적으로 처형당하고 집안이 망할 때 김병연의 나이 다섯 살이었으니 어렴풋이나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했을 것이고, 그 뒤 이리저리 떠돌며 숨어살던 일이며, 아버지가 울화병으로 젊은 나이에 죽은 이유도 알고 남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런 병연이 자신의 할아비를 ‘만 번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매도했을 리도 만무하다. 그리고 방랑길에 나선 곳도 동강변 마을인 삼옥리가 아니라 영월읍에서 남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어둔리에 살던 때라고 추정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김삿갓에 관한 옛 기록은 같은 시대 사람 신석우(申錫愚 ; 1805~ 1865)의 <해장집(海藏集)>, 황오(黃五 ; 1816~ ?)의 <녹차집(綠此集)>, 그리고 일제강점기인 1926년에 나온 강학석(姜學錫)의 <대동기문(大東奇聞)>, 장지연(張志淵)이 편찬한 <대동시선(大東詩選)> 및 1939년 이응수(李應洙)가 수집하여 펴낸 최초의 김삿갓 시집인 <김립시집> 등이 있다.

이 가운데서 <대동기문>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김병연은 안동 김씨다. 그의 조부 익순이 선천부사로 있을 때 홍경래에게 항복한 죄로 사형을 당하고 그 집안이 폐족이 되어버렸다. 병연이 스스로 천지간의 죄인이라면서 삿갓을 쓰고 하늘의 해를 보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김삿갓이라고 불렀다. 김삿갓은 공령시(功令詩 : 科詩體)를 잘 지어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일찍이 관서지방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곳에 노진이란 사람이 공령시를 잘 지었는데 김삿갓보다는 못했다. 그래서 노진은 김삿갓을 관서지방에서 쫓아내려고 김익순을 조롱하는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았다.

-대대로 이어온다는 나라의 신하 김익순아 / 가산군수 정시는 하찮은 벼슬에 불과했지만 / 너의 가문은 이름난 안동 김씨 / 훌륭한 집안에 이름도 장안을 울리는 순(淳)자 항렬이로다… -

김삿갓이 이 시를 보고 한번 크게 읊은 뒤에 “참 잘 지었다!”하더니 피를 토하고 다시는 관서 땅을 밟지 않았다. ‘

이러한 여러 기록을 살펴보건대 김삿갓의 가출과 방랑은 빼어난 재주를 타고났건만 출신성분 때문에 구만리 같은 앞길이 막혀버린 좌절감과 울분이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저런 이유로 자신의 인생과 장래를 두고 수년간 고민하던 김병연은 가출을 단행했다. 그것이 맏아들 학균(翯均)이 태어난 직후인 22세 때였다. 대삿갓 쓰고 대지팡이 짚고 미투리 신고 방랑길에 나선 김삿갓은 어제는 저 고을 오늘은 이 마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구만리 장천 높다 해도 머리 들기 힘들고 / 삼천리 땅 넓다 해도 발뻗기 힘들구나. -

(九萬里長天擧頭難 三千地間未足宜)

그가 뒷날 읊은 <자탄(自歎)>의 한 구절인데, 천지간을 떠돌기 시작한 김삿갓의 심경을 짐작할 수 있다. 집도 처자도 버리고 길 떠난 김삿갓의 발길은 먼저 금강산으로 향했다. 김삿갓은 22세에 가출해 57세로 전라도 화순에서 죽을 때까지 35년을 방랑하면서 특히 금강산을 좋아하여 여러 차례 찾았다고 한다. 그와 같은 시대 사람인 신석우의 <해장집>과 황오의 <녹차집>에 김삿갓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데, 그가 봄․가을마다 금강산을 찾을 만큼 금강산의 절경에 반했다고 한다. 지금도 금강산에는 김삿갓이 절경을 읊었다는 전설이 서린 명승이 많다. 다음은 김삿갓의 금강산 시 7, 8수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이다.

-소나무와 소나무 잣나무와 잣나무 / 바위와 바위를 돌아가니 / 물에 물 산에 산 / 곳곳이 절경이로다! - (松松栢栢岩岩廻 水水山山處處奇)

정해진 곳도 없으려니와 오라는 곳도 없이 떠난 유랑길, 구름 따라 물결 따라 발길 닿는 대로 떠도는 신세, 행장이라고 별 것도 없었다. 스스로 읊은 대로 ‘빈 배처럼 가뿐한’ 삿갓 쓰고 죽장 짚고 괴나리봇짐 하나 짊어진 것이 다였다. 삿갓을 노래한 그의 시 <영립(詠笠>’을 소개한다.

- 가뿐한 나의 삿갓 빈 배와 같고 / 한번 쓰니 사십 평생 다 가는구나 / 소먹이 아이 들에 나서며 쉽게 걸치고 / 고기잡이 노인 갈매기 벗 삼는 것일세 / 술 취하면 바라보던 꽃나무에 걸어놓고 / 흥 오르면 달뜬 누각에도 걸치고 오르네 / 세상사람 의관은 겉꾸밈이 한결같지만 / 하늘 가득 비바람 쳐도 홀로 걱정 없어라.-

본명은 김병연, 자는 성심(性沈), 호는 난고(蘭皐)였지만 세상을 떠돌아다니면서 그는 누구에게도 이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삿갓 쓰고 다니는 이 기이한 방랑시인을 가리켜 김삿갓, 한문으로는 김립(金笠)․김사립(金莎笠)․김대립(金籉笠)이라고 불렀다. 김삿갓은 정 곤란한 경우에는 자신의 이름이 김난(金鑾)이요 자는 이명(而鳴)이라고 둘러댔는데 난은 방울 난, 이명은 그럼으로써 울린다는 해학에 다름 아니었다. 또 호를 물으면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걸치고 다닌다고 해서 지상(芷裳)이라고 했으니 이는 궁궁이풀(구리때)옷이라는 뜻이다.

김삿갓이 환대보다는 문전박대를 더 많이 당하면서 방랑의 풍류기행을 감행하던 순조~ 철종 연간에는 김삿갓 외에도 우리 역사를 빛낸 풍류 명인이 많았다. 필자가 조사해보니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영조 38년(1762)에 태어나 김삿갓보다 45세 연상인데 김삿갓이 방랑생활을 시작할 순조 30년(1830) 무렵 전남 강진 다산초당에서 12년째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정조 10년(1786)에 태어나 김삿갓보다 21세 연상인데 그 무렵 벼슬살이와 귀양살이를 되풀이하면서도 학문과 예술에 정진 중이었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는 김삿갓과 비슷한 연배로서 필생의 목표인 정확한 우리나라 지도제작을 위해 삼천리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고산자의 일생은 김삿갓보다 더욱 짙은 신비의 장막에 싸여 있는데, 그의 친구인 실학자 최한기(崔漢綺 ; 1804~ 1877)의 기록에 ‘나의 벗 정호는 소년 때부터 지리학에 깊은 뜻을 두고…’하는 대목이 있다. 이에 따라 고산자는 김삿갓보다 3, 4세 많거나 비슷한 나이로 추정된다. 또 평생토록 나라 안을 떠돌아다녔으니 이 두 기인이 어디에선가 틀림없이 만났으리라는 것이 필자의 추측이다. 그리고 김삿갓이 금강산은 해마다 한두 차례 꼭 찾아간 대신 백두산은 먼발치에서만 바라보고 올라가지 못한 것을 자신의 시에서 한탄한 반면, 고산자는 7, 8회나 백두산에 올랐다는 설이 있다.

판소리의 중흥조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는 순조 12년(1812)에 태어나 김삿갓보다 5세 아래다. 그가 고창 고을 아전을 그만두고 소리꾼들을 불러 모아 판소리 여섯 마당을 집대성하기 시작한 것은 45세였다고 하니 아마도 김삿갓이 방랑길을 떠날 때에 그는 아전 노릇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김삿갓이 세상을 떠난 직후 아들 고종(高宗)의 즉위와 더불어 정권을 장악하고 64년에 걸친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끝장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은 순조 20년(1820)에 태어나 김삿갓보다 13세 연하다. 김삿갓이 세상을 떠돌 무렵 그는 안동 김씨 일족의 눈총에 맞아 죽지 않기 위해 파락호 노릇을 하면서 깊은 뜻을 감추고 있었다.

이 밖에 미완의 혁명 갑신정변의 주인공 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은 김삿갓이 죽기 12년 전에, 동학농민혁명의 주역 전봉준(全琫準)은 김삿갓이 죽기 8년 전에 태어났다.

김삿갓의 조부 김익순이 역적으로 처형당해 김삿갓의 구만리 같은 앞길이 막혀버린 것은 이미 밝힌 바와 같다. 그러나 법대로 삼족을 멸했다면 김삿갓 일가족 다섯 명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살아남은 까닭은 오로지 당시 정권을 장악한 안동 김씨 일족이었기 때문이었다. 김삿갓의 할아비 김익순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문을 연 김조순(金祖淳)과 같은 항렬이요, 아버지 김안근은 철종의 장인인 김문근(金汶根)과 김좌근(金左根) 등과 같은 항렬이요, 김삿갓 또한 세도정치의 핵심 인물이던 김병학(金炳學)․병익(炳翊)․병국(炳國)․병기(炳冀) 등과 같은 항렬이었다.

따라서 할아비가 역적으로 처형당하지만 않았다면 김삿갓도 남들처럼 과거를 보고 벼슬길에 올라 3정승 6판서는 몰라도 세속적 의미의 출세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었다면 우리가 흠모하는 위대한 서민시인․풍류가객 김삿갓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가정(假定)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김삿갓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주는 기록은 없지만 자신의 시 가운데에 ‘내 평생에 긴 허리 굽힐 생각 없는데 / 이 밤은 다리 뻗기도 힘들구나’ 하는 구절이 있어 키가 크고 풍채가 늠름했으리라고 짐작하게 해준다. 홀홀단신 빈털터리로 집을 떠난 김삿갓은 정해진 곳도, 오라는 곳도 없이 구름 따라 바람 따라 발길 닿는대로 나라 안을 떠돌아다녔다. 그런 신세를 읊은 대표적 작품인 <대시(竹詩)>를 소개한다.

-이대로 저대로 되어가는 대로

바람치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생기는 이대로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붙이는 저대로

손님 접대는 가세대로

시정 매매는 세월대로

만사가 안 되네 내 마음대로

그렇고 그렇고 그런 세상 지나가는 대로 -

(此竹彼竹化去竹 / 風打之竹浪打竹 /

飯飯粥粥生此竹 / 是是非非付彼竹 /

賓客接待家勢竹 / 市井賣買歲月竹 /

萬事不如吾心竹 / 然然然世過然竹)

그렇게 주유천하하던 김삿갓은 2년 뒤에 잠깐 돌아와 후사 없이 일찍 죽은 형 병하에게 자신의 맏이 학균을 양자로 입양시키고, 둘째아들 익균(翼均)이 태어나자 다시 방랑길에 나섰다.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떠도는 인생, 세상잡사 초탈하여 풍류 한마당으로 천지간을 배회하니 신선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김삿갓을 가리켜 뒷날 사람들이 한국의 시선(詩仙)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선도 지상에 머무는 동안은 먹어야만 했으므로 때로는 마을에서 문전걸식도 했고 때로는 산사에서 공양 신세를 지기도 했다. 어쩌다가 운율깨나 아는 주인을 만나면 제법 그럴듯한 환대도 받았을 것이고, 또 기막히게 운수대통한 날이면 풍류를 알아주는 어여쁜 기생으로부터 아래위로(?) 극진한 사랑을 받기도 했을 것이다.

널리 알려진 김삿갓 시의 특징이 풍자와 해학을 주류를 이루거니와 오만불손한 중과 선비를 욕질한 시 가운데 이런 작품도 있다.

- 중놈의 둥굴둥굴 민대가리는 땀찬 말불알 / 선비놈의 뾰족뾰족 송곳머리는 앉은 개좆 / 악쓰는 소리는 구리솥에 떨어진 구리방울 / 치뜬 눈깔은 흰죽에 떨어진 후추 같구나! -

어느 날 어느 서당에 들러 잠시 쉬자니 버르장머리 없는 학동 녀석들이 거지나 다름없이 초라한 행색의 김삿갓을 깔보고 놀려댔다. 김삿갓이 칠판 아닌 벽판에 시 한 수를 써 붙인 뒤 이렇게 일러주고 떠났다. “이 시는 글자 뜻으로 새기는 것이 아니라 소리나는 대로 새기느니라.”- 書堂乃早至 先生來不謁 房中皆尊物 學生諸未十 -

또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유식한 척하는 부부가 끼니때가 되어도 식사 대접할 마음이 없어 딴에는 암호 같은 파자(破字)로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마누라 ; 인량차팔(人良且八 ; 食具= 밥상 차릴까요?)

서방 ; 월월산산(月月山山 ; 朋出= 이 친구 가거든.)

파자시의 대가인 김삿갓 앞에서 이럴 수가! 그야말로 공자 앞에서 문자 쓰고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은 격이었다. 김삿갓이 자기도 이렇게 파자로 암호 같은 한마디를 툭 던지고 떠나버렸다. “이 견자화중(犭者禾重)아 정구죽천(丁口竹天)이구나(猪種可笑= 이 돼지새끼들아, 가소롭구나!)”

언젠가는 허씨가 많이 사는 함경도 길주에 갔는데 하룻밤 묵어가려고 이 집 저 집을 찾아다녔지만 아무 집도 길손을 받아주지 않았다. 김삿갓의 입에서 이런 시가 한숨처럼 새어나왔다.

-길주 길주 하지만 길한 고을 아니고 / 허가 허가 많지만 허가하지 않는구나.-

(吉州吉主不吉州 許哥許哥不許哥)

이렇게 저렇게 모진 세파에 부대끼며 제대로 얻어먹지도 못하고 다녔으니 그의 입에서 아름답고 고상한 싯구만 나올 턱이 만무했다. 하지만 예나 이제나 세상의 인정이 죄다 메마른 것은 아니다. 가난한 살림이지만 따스한 마음씨로 정성껏 외로운 나그네를 대접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김삿갓은 어느 집에서는 이런 제목 없는 시 한 수를 선물로 남기고 떠나기도 했다.

- 네 다리 소나무 소반에 죽이 한 그릇 / 하늘과 구름이 함께 떠도네 / 주인장, 제발 무안해 마오 / 물 속의 청산을 나는 사랑한다오. -

(四脚松盤粥一器 天光雲彩共徘徊

主人莫道無顔色 吾愛靑山倒水來)

풍류호걸 김삿갓 가는 길에 시와 술과 여자도 있었으리니 은근하고 감칠맛 나는 사랑의 시편도 어찌 없었으랴. 다음은 <회양을 지나며(淮陽過次)>라는 시.

- 산골 처녀 다 커서 어른 같은데 / 분홍빛 짧은 치마 헐렁하게 입었네 / 맨살 허벅지 다 드러나니 길손이 부끄러워 / 솔 울타리 깊은 집엔 꽃향기도 물씬하리.-

또 <기생에게 주다(贈妓)>라는 시에서는 이렇게 읊었다.

- 꽃냄새 파고드는 사내 한밤중에 찾아가니 / 온갖 꽃 짙게 피어도 모두 무정터라 / 홍련을 꺾고 남포(南浦)로 가니 / 동정호 가을 물결에 작은 배만 놀라네. -

이들 시에서 ‘솔 울타리 깊은 집’이니 ‘남포’니 ‘동정호’니 하는 것은 모두 여성의 은밀한 부위를 가리킨다는 사실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김삿갓이 함흥을 거쳐 단천에 갔을 때에 어떤 처녀와 눈이 맞아 3년간 훈장 노릇을 하며 살았다는 설도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김삿갓은 자신이 처자식을 버리고 떠돌아다니는 유부남이라는 점을 밝혔을까 아니면 숨겼을까. 오며가며 짧은 밤을 불태운 떠돌이 사랑이야 풍류가객 김삿갓으로서 한두 번이 아니겠지만 몇 해씩 한 자리에 주저앉아 신장개업(?)을 했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는 것이 필자의 추측이다. 또 하룻밤을 지내고 보니 숫처녀가 아니어서 “털이 깊고 속이 활짝 열렸으니 필시 누가 지나갔으렸다?(毛深內濶 必過他人)”하자 처녀가 이를 맞받아, “뒤뜰의 익은 밤은 벌이 없어도 갈라지고 개울가 버들은 비가 안 와도 잘 자란답니다(後園黃栗不蜂折 溪邊楊柳不雨長)”했다는 우스갯소리도 호사가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시문을 아는 기생들과 사귀며 시와 사랑을 주고받은 흔적은 그의 작품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또 다른 <기생에게 주다(贈妓)>라는 시도 그렇다.

-잡는 손도 뿌리치고 어울리기 어렵더니 / 되돌아와 한자리에서 친해졌구려 / 이 주선(酒仙) 저자에서 숨은 여인과 사귀니 / 이 여인 글 잘하는 문인이구려 / 우리 서로 옷고름 풀기까지 가까웠을 때 / 그대 모습 달빛에 술잔에 새로이 어리네 / 이제 서로 껴안고 동녘 성곽 달빛 아래서 / 술 취해 쓰러지듯 봄날 기듯이 정을 통하네. -

김삿갓의 문학적 천재성은 과시체 공령시에서 더욱 뛰어났다는 연구자들의 의견도 있지만, 아무래도 김삿갓 시의 특성과 비상한 천재성은 그때까지 양반문학의 주류를 이루던 전통 양식의 한시를 다양한 소재와 어휘와 문자를 통해 풍자․해학․기지 넘치는 서민문학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 있다고 하겠다. 후대의 시인으로서 김삿갓의 문학성을 가장 먼저 거론한 사람이 천태산인(天台山人) 김태준(金台俊)이다. 그는 1931년 조선어문학회에서 펴낸 <조선한문학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삿갓 아래로 본 세상을 골계․풍자․해학의 여러 법과 파격적인 시, 시희(詩戱)․자희(字戱) 등으로 이를 음파(吟破)하여버렸다.’

어쨌든, 김삿갓의 어머니 함평 이씨는 막내아들과 남편, 맏아들을 차례로 잃고 믿었던 둘째아들마저 집을 떠나 방랑하자 충청도 홍성 땅 결성의 친정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궁벽한 산골에는 김삿갓의 부인 황씨와 아들․며느리만 남게 되었고, 가장 노릇은 둘째 익균이 맡아서 했다.

심심산중 적막강산에 갇혀 아들 내외와 더불어 화전민으로 연명하며 생과부의 설움을 씹었을 김삿갓의 부인 장수 황씨는 밤이면 밤마다 자신을 버리고 떠나버린 지아비가 얼마나 야속했으며 무섭고 외로웠을까. 하지만 김삿갓은 집에는 돌아올 줄 모르면서 홍성 외가로 돌아간 어머니는 그리웠는지 방랑 중 틈틈이 홍성을 찾아 먼발치로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갔다고 한다.

그동안 양자로 간 학균 대신 집안의 대를 이은 익균이 아비를 찾으려고 여러 차례 집을 나서 풍문이 들려오는 곳마다 쫓아다녔다. 간혹 바람결에 실려 묘향산에서 보았다는 소식도 있고, 또 평양 기생과 살림을 차렸다는 눈에 쌍심지 돋는 소문이 있는가 하면, 영남 땅 어디선가 객사했다는 불길한 소식이 들려오기도 했다. 학균이 한 번은 경상도 안동에서, 한 번은 강원도 평강에서, 또 한 번은 전라도 여산에서 김삿갓을 찾아 집으로 모시고 가려고 했으나 번번이 아들을 속이고 도망치는 바람에 놓치고, 결국은 전라도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시신을 모시고 돌아왔다.

철종 14년(1863년) 3월 29일 57세로 한 많고 파란 많은 이승살이의 막을 내린 김삿갓은 제2의 고향인 영월군 하동면 와석1리 노루목에서 외롭고 괴로웠던 유랑의 발길을 멈춘 채 영원한 휴식에 들어갔다. 22세에 방랑길을 떠난 지 35년 만이었다.

김삿갓이 오랜 방랑을 멈추고 묻혀 있는 영월은 단종(端宗)의 비극이 서린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김삿갓이 이곳에서 영원히 잠들기 400년 전에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당했다가 짧지만 한 많은 한 삶을 마친 곳이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당해 피눈물로 얼룩진 귀양살이를 하던 청령포도 영월 서강변에 있고, 그가 원통하게 죽어 묻힌 장릉도 이곳에 있다. 평창에서 흘러온 서강과 정선에서 흘러온 동강이 영월읍 서쪽 합수머리에서 어우러져 고씨동굴과 단양 온달산성 앞을 거쳐 충주호로 흘러들어가며 남한강 상류를 이룬다. 이 강의 본줄기가 단양 쪽으로 머리를 틀기 전에 왼쪽에서 흘러드는 작은 물줄기를 받아들이니 곧 옥동천이다. 영월읍에서 고씨동굴 앞을 지나 각동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옥동천을 끼고 태백․삼척 가는 길을 따라 들어가면 대야리 ․ 옥동리에 이어 와석리 김삿갓계곡 들머리에 이른다.

천생의 풍류가객 김삿갓이 고달픈 방랑길, 때로는 즐거웠던 방랑의 발길을 멈추고 영원히 잠든 묘는 노루목에 있다. 노루목 김삿갓 묘역으로 오르는 길가에 수많은 김삿갓시비와 기념비가 서 있고, 서낭당 한 채도 있다. 서낭당 앞에서 갈라진 오른쪽 길로 오르면 이내 김삿갓묘요, 왼쪽 산길로 계속 오르면 어둔리 선락골을 지나 선래골이 나온다. 김삿갓 일가가 삼옥리를 떠나 들어와 살던 집터가 있는 곳이다. 선락이니 선래니 하는 지명은 우리의 시선 김삿갓이 살았기에 비롯된 것이다.

왕조 말 어지러운 시대의 그늘에서 좌절과 실의를 딛고 죽을 때까지 외로운 발길을 멈추지 않았던 김삿갓의 방랑 또한 그 나름대로 깨달음에 이르러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구도행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요즘 세상에는 유행가 가사보다 못한 시를 쓰는 엉터리 시인이 헤아릴 수 없이 많고, 해마다 수백 권의 시집이 나오지만 참으로 시다운 시는 찾아보기 어렵다. 김삿갓이 비록 생전에 시집 한 권 남긴 적 없지만 수많은 사람이 그의 시를 찾아 읽고 즐기는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그가 이 땅에서 살다간 그 어떤 시인보다도 비상한 시재를 지닌 불세출의 풍류가객이었으며, 보통 사람들과 애환을 함께 한 진솔하고 친근한 서민의 벗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가 이미 144년 전에 이승을 떠나고 없지만 아직도 수많은 그의 시와 일화가 우리 곁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다. 김삿갓의 시 한 구절을 더 소개하면서 글을 마무리한다.

-세상만사 이미 정해져 있거늘 / 뜬구름같이 덧없는 인생 공연히 서두르고만 있네. - (萬事皆有定 浮生空自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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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진 2018-01-19 00:46:28
삿갓에 얽힌 이야기들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