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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가계와 일생
김삿갓 가계와 일생
  • 두메산골
  • 승인 2018.01.18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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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원갑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올해는 김삿갓이 탄생한 지 210주년, 세상을 뜬 지는 134주년이 되는 해이다. 김삿갓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김삿갓이 숱한 전설과 일화를 남기며 방랑하던 풍류시인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아직도 그의 본명을 모르는 사람이 많고, 더군다나 그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 무슨 까닭에 한평생 방랑을 했으며, 언제 어디에서 세상을 떠나 어디에 묻혔는지 모르는 사람은 더욱 많다.

사람들은 김삿갓이 22세 때 집을 떠나 정처 없이 방랑하다가 57세 때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에서 세상을 뜨기까지 35년간 한 번도 집에 돌아오지 않은 줄 알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김삿갓은 형 병하가 죽자 집에 돌아와 맏아들 학균을 양자로 보냈고, 본부인 장수 황씨가 죽자 집에 돌아와 경주 최씨를 맞아 재혼을 했으며, 아들 학균과 익균의 장가도 보내는 등 여러 차례 집에 돌아와 가정사를 보살핀 기록이 있다. 해마다 집에 돌아오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4, 5년마다 한 차례씩은 집에 다녀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필자가 김삿갓의 전기소설을 쓰기 위해 조사한 사료를 바탕으로 그의 가계를 살펴보고 그의 일생을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김삿갓의 할아버지 김익순은 1764년(영조 40)에 출생하여 함흥 중군과 선천부사를 지냈다. 나중에 홍경래난 때 반란군에게 항복한 것을 보면 그는 제대로 된 무인이 아니라 안동 김씨 문중 혈연 덕분으로 벼슬을 한 것으로 보인다. 순조의 장인으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문을 연 김조순이 같은 항렬인 것만 봐도 그렇다.

김익순은 두 살 위인 전주 이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 김안근을 낳았다. 그때가 김익순이 스물두 살 때인 1786년(정조 10년)이었다. 홍경래군에게 항복하고 이듬해 난이 평정된 뒤 역적으로 처형당할 때 김익순의 나이 48세였다.

김안근은 홍경래난이 진압되고 아버지 김익순이 처형당할 때 스물여섯 살로 과거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김안근은 한 살 아래인 함평 이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병하, 병연, 병호 아들 3형제를 두고 있었다. 그해에 맏아들 병하는 1805년생으로 8세, 둘째 병연은 1807년생으로 6세, 막내 병호는 젖먹이였다. 둘째 병연이 바로 김삿갓이다.〮

1811년(순조 11) 홍경래난이 일어나고 이듬해 난이 진압되어 할아버지 김익순이 역적으로 처형당해 집안이 망하자 병하와 병연 형제는 김성수라는 종이 데리고 황해도 곡산으로 도망쳤고, 부모는 아우 병호만 데리고 경기도 광주로 도망쳐 숨어살았다.

2년 뒤 삼족을 멸하는 처분에서 목숨은 살려주는 폐족으로 경감되자 병하와 병연은 아버지가 보낸 사람을 따라 광주로 가서 가족이 다시 합쳐졌다. 아버지는 식솔을 이끌고 광주에서 양평으로 내려갔는데, 병약하던 막내 병호가 죽어버렸다. 문중에서는 역적이 났으니 가문의 치욕이라면서 족보에서 지워 없앤다는 소리가 나왔고, 그런저런 이유로 쌓이고 쌓였던 수치심과 분노가 울화병이 되어 아버지마저 그만 39세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38세에 과부가 된 어머니는 두 아들을 데리고 경기도 가평을 거쳐 강원도 두메산골로 들어갔다. 평창 미탄에서 조금 살다가 다시 영월 삼옥리로 이사했다. 병하와 병연 형제가 장가를 든 곳이 바로 이곳이고, 김삿갓이 방랑을 떠난 곳도 바로 이 영월 땅이었다. 그런데 <안동김씨대동보>를 살펴보니 공교롭게도 두 형제가 모두 연상의 황씨에게 장가든 것으로 나온다. 형 병하의 부인은 두 살 위인 창원 황씨요, 병연의 부인은 한 살 위인 장수 황씨였다. 병연이 장가든 것은 그의 나이 16세 때였다.

원래 병약했던 병하는 자식이 없었지만 병연은 장가든 이듬해인 17세 때에 첫아들 학균을 낳았다. 1824년(순조 24)이었다. 그리고 형 병하가 26세로 죽던 1830(순조 30)에 둘째아들 익균을 낳았다.

김병연이 죽장 짚고 삿갓을 쓰고 방랑을 떠난 것은 22세 때인 1829년이었다. 그런데 그 이듬해인 1830년에 형 병하가 후사도 없이 죽어버렸다. 집에 돌아온 김삿갓은 아들 학균을 형의 양자로 보냈는데 공교롭게도 그해에 둘째아들 익균을 보았다. 형수 창원 황씨도 오래 살지 못하고 2년 뒤인 1832년에 30세로 죽고 말았다.

김삿갓은 다시 방랑을 떠났다. 그런데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838년에 한 살 위인 부인 장수 황씨가 32세 한창나이에 죽어버렸다. 두 아들은 고아가 되어버렸다. 집에 돌아온 김삿갓은 부인의 장례를 치르고 얼마 뒤에 열 살 아래인 경주 최씨를 후처로 맞아들였다.

그때 어머니 함평 이씨는 집안이 망하고 남편이 죽고 맏아들도 먼저 죽자 모든 것을 버리고 충청도 홍성 친정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불행은 끝없이 밀려왔다. 1843년(헌종 9)에 다 키운 맏아들 학균이 갑자기 죽어버렸던 것이다. 그때 학균의 나이 19세, 며느리 평택 임씨는 21세에 과부가 되어버렸다. 그때 김삿갓의 나이 36세였다.

김삿갓이 1863년 음력 3월 29일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에서 57세로 세상을 뜬 뒤 후실 경주 최씨도 죽고 남은 가족은 아들 익균과 며느리 반남 박씨 내외밖에 없었다. 익균이 3년 뒤에 화순으로 가서 가매장한 김삿갓의 묘를 파고 유골을 추려 등짐을 만들어 이곳 마대산 기슭 어둔리로 돌아와 모신 것이다.

삿갓으로 하늘을 가리고 죽장 짚고 미투리 신고 한평생을 떠돌아다닌 천재시인 김삿갓, 풍자와 해학과 기지로 어우러진 파격적 시풍, 보통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기행으로 가는 곳마다 전설을 남기고 사라진 방랑시인 김삿갓, 그는 바람처럼 구름처럼 물결처럼 이 땅의 산수와 저자 간을 마음대로 넘나든 영원한 자유인이요 풍류시객이었다. 김삿갓이 평생을 해학과 풍자로 방랑하던 풍류시인이며 기인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한 점 뜬구름 같고 한줄기 바람 같았던 그의 기구하고 불행했던 한 삶의 자취를 똑똑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만큼 그의 일생은 널리 알려진 명성과는 달리 신비에 싸여 있어 강원도 영월 땅에 그의 일가가 숨어살던 집터가 있고, 김삿갓의 묘도 그 근처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도 불과 35년 전인 1982년 10월이었다.

이는 오로지 영월의 향토사학자였던 고 박영국 선생의 오랜 현장답사와 자료를 통한 연구의 결실이었다. 박 선생은 1974년부터 김삿갓의 발자취를 추적하기 시작하여 1982년 10월에 마침내 영월군 하동면 와석1리 노루목에서 김삿갓의 묘와 어둔리 선락골의 집터를 찾아냈을 뿐 아니라, 그 뒤 199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사재까지 털어가며 김삿갓 유적지 보존운동을 벌이고, 곳곳에 묻혀 있는 김삿갓의 미공개 시와 일화를 발굴해내는 데에 심혈을 쏟았다.

필자가 박 선생과 함께 처음으로 김삿갓 묘와 집터를 답사한 것은 한국일보사 기자였던 1984년 여름이었다. 그때 이미 오래 전에 폐가가 되어버린 김삿갓의 집터에서 그의 어머니와 부인과 며느리 등 여인 3대가 눈물과 한숨을 섞어 곡식을 빻았을 디딜방아를 발견하여 가슴이 뭉클했던 기억이 새롭다. 또 그날 영월군청에서 지프를 빌려 김삿갓 유적을 찾아가는데, 너무나 산길이 험악해 머리에 혹이 여러 개 생겼던 것도 추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은 그때 길 같지도 않던 7km의 진입로가 매끈한 아스팔트 포장길로 변했고, 골짜기 이름도 와석리계곡에서 김삿갓계곡으로, 지명도 하동면에서 김삿갓면으로 바뀌었으니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는 느낌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김삿갓에 관한 옛 기록은 같은 시대 사람 신석우(1805~ 1865)의 <해장집>, 황오(1816~ ?)의 <녹차집>, 그리고 일제강점기인 1926년에 나온 강학석의 <대동기문>, 장지연이 편찬한 <대동시선> 및 1939년 이응수가 수집하여 펴낸 최초의 김삿갓 시집인 <김립시집> 등이 있다. 이 가운데서 <대동기문>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김병연은 안동 김씨다. 그의 조부 익순이 선천부사로 있을 때 홍경래에게 항복한 죄로 사형을 당하고 그 집안이 폐족이 되어버렸다. 병연이 스스로 천지간의 죄인이라면서 삿갓을 쓰고 하늘의 해를 보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김삿갓이라고 불렀다. 김삿갓은 공령시(과시체)를 잘 지어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일찍이 관서지방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곳에 노진이란 사람이 공령시를 잘 지었는데 김삿갓보다는 못했다. 그래서 노진은 김삿갓을 관서지방에서 쫓아내려고 김익순을 조롱하는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았다.

- 대대로 이어온다는 나라의 신하 김익순아 / 가산군수 정시는 하찮은 벼슬에 불과했지만 / 너의 가문은 이름난 안동 김씨 / 훌륭한 집안에 이름도 장안을 울리는 순(淳)자 항렬이로다… -

김삿갓이 이 시를 보고 한번 크게 읊은 뒤에 “참 잘 지었다!”하더니 피를 토하고 다시는 관서 땅을 밟지 않았다.’

이러한 여러 기록을 살펴보건대 김삿갓의 가출과 방랑은 빼어난 재주를 타고났건만 출신성분 때문에 구만리 같은 앞길이 막혀버린 좌절감과 울분이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저런 이유로 자신의 인생과 장래를 두고 수년간 고민하던 김병연은 가출을 단행했다. 대삿갓 쓰고 대지팡이 짚고 미투리 신고 방랑길에 나선 김삿갓은 어제는 저 고을 오늘은 이 마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집도 처자도 버리고 길 떠난 김삿갓의 발길은 먼저 금강산으로 향했다. 김삿갓은 22세에 가출해 57세로 전라도 화순에서 죽을 때까지 35년을 방랑하면서 특히 금강산을 좋아하여 여러 차례 찾았다고 한다. 그와 같은 시대 사람인 신석우의 <해장집>과 황오의 <녹차집>에 김삿갓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데, 그가 봄 ․ 가을마다 금강산을 찾을 만큼 금강산의 절경에 반했다고 한다.

 

정해진 곳도 없으려니와 오라는 곳도 없이 떠난 유랑길, 구름 따라 물결 따라 발길 닿는 대로 떠도는 신세, 행장이라고 별 것도 없었다. 스스로 읊은 대로 ‘빈 배처럼 가뿐한’ 삿갓 쓰고 죽장 짚고 괴나리봇짐 하나 짊어진 것이 다였다. 삿갓을 노래한 그의 시 <영립>이다. - 가뿐한 나의 삿갓 빈 배와 같고 / 한번 쓰니 사십 평생 다 가는구나 / 소먹이 아이 들에 나서며 쉽게 걸치고 / 고기잡이 노인 갈매기 벗 삼는 것일세 / 술 취하면 바라보던 꽃나무에 걸어놓고 / 흥 오르면 달뜬 누각에도 걸치고 오르네 / 세상사람 의관은 겉꾸밈이 한결같지만 / 하늘 가득 비바람 쳐도 홀로 걱정 없어라. -

김삿갓이 환대보다는 문전박대를 더 많이 당하면서 방랑의 풍류기행을 감행하던 순조 ~ 철종 연간에는 김삿갓 외에도 우리 역사를 빛낸 풍류 명인이 많았다. 필자가 조사해보니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다. 다산 정약용은 영조 38년(1762)에 태어나 김삿갓보다 45세 연상인데 김삿갓이 방랑생활을 시작할 순조 30년(1830) 무렵 전남 강진 다산초당에서 12년째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추사 김정희는 정조 10년(1786)에 태어나 김삿갓보다 21세 연상인데 그 무렵 벼슬살이와 귀양살이를 되풀이하면서도 학문과 예술에 정진 중이었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 김정호는 김삿갓과 비슷한 연배로서 필생의 목표인 정확한 우리나라 지도제작을 위해 삼천리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고산자는 김삿갓과 비슷한 나이로 추정된다. 또 평생토록 나라 안을 떠돌아다녔으니 이 두 기인이 어디에선가 틀림없이 만났으리라는 것이 필자의 추측이다. 그리고 김삿갓이 금강산은 해마다 한두 차례 꼭 찾아간 대신 백두산은 먼발치에서만 바라보고 올라가지 못한 것을 자신의 시에서 한탄한 반면, 고산자는 7, 8회나 백두산에 올랐다는 설이 있다.

판소리의 중흥조 동리 신재효는 순조 12년(1812)에 태어나 김삿갓보다 5세 아래다. 그가 고창 고을 아전을 그만두고 소리꾼들을 불러 모아 판소리 여섯 마당을 집대성하기 시작한 것은 45세였다고 하니 아마도 김삿갓이 방랑길을 떠날 때에 그는 아전 노릇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필자는 김삿갓 전기소설을 쓰면서 김삿갓이 고산자 김정호, 동리 신재효와 의형제를 맺고 두터운 우정을 나눈 것으로 그렸다.

김삿갓이 세상을 떠난 직후 아들 고종의 즉위와 더불어 정권을 장악하고 64년에 걸친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끝장낸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순조 20년(1820)에 태어나 김삿갓보다 13세 연하다. 김삿갓이 세상을 떠돌 무렵 그는 안동 김씨 일족의 눈총에 맞아 죽지 않기 위해 파락호 노릇을 하면서 깊은 뜻을 감추고 있었다.

이 밖에 미완의 혁명 갑신정변의 주인공 고균 김옥균은 김삿갓이 죽기 12년 전에, 동학농민혁명의 주역 전봉준은 김삿갓이 죽기 8년 전에 태어났다.

김삿갓의 조부 김익순이 역적으로 처형당해 김삿갓의 구만리 같은 앞길이 막혀버린 것은 이미 밝힌 바와 같다. 그러나 법대로 삼족을 멸했다면 김삿갓 일가족 다섯 명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살아남은 까닭은 오로지 당시 정권을 장악한 안동 김씨 일족이었기 때문이었다. 김삿갓의 할아비 김익순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문을 연 김조순과 같은 항렬이요, 아버지 김안근은 철종의 장인인 김문근과 김좌근 등과 같은 항렬이요, 김삿갓 또한 세도정치의 핵심 인물이던 김병학 ․ 병익 ․ 병국 ․ 병기 등과 같은 항렬이었다.

따라서 할아비가 역적으로 처형당하고 폐족만 되지 않았다면 김삿갓도 남들처럼 과거를 보고 벼슬길에 올라 3정승 6판서는 몰라도 세속적 의미의 출세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었다면 우리가 흠모하는 위대한 풍류시객 김삿갓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가정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김삿갓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주는 기록은 없지만 자신의 시 가운데에 ‘내 평생에 긴 허리 굽힐 생각 없는데 / 이 밤은 다리 뻗기도 힘들구나.’하는 구절이 있어 키가 크고 풍채가 늠름했으리라고 짐작하게 해준다. 혈혈단신 빈털터리로 집을 떠난 김삿갓은 정해진 곳도, 오라는 곳도 없이 구름 따라 바람 따라 발길 닿는 대로 나라 안을 떠돌아다녔다. 그런 신세를 읊은 대표적 작품인 <죽시>를 소개한다.

 

- 이대로 저대로 되어가는 대로

바람치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생기는 이대로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붙이는 저대로

손님 접대는 가세대로

시정 매매는 세월대로

만사가 안 되네 내 마음대로

그렇고 그렇고 그런 세상 지나가는 대로 -

(此竹彼竹化去竹 / 風打之竹浪打竹 /

飯飯粥粥生此竹 / 是是非非付彼竹 /

賓客接待家勢竹 / 市井賣買歲月竹 /

萬事不如吾心竹 / 然然然世過然竹)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떠도는 인생, 세상잡사 초탈하여 풍류 한마당으로 천지간을 배회하니 신선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김삿갓을 가리켜 뒷날 사람들이 한국의 시선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선도 지상에 머무는 동안은 먹어야만 했으므로 때로는 마을에서 문전걸식도 했고 때로는 산사에서 공양 신세를 지기도 했다. 어쩌다가 운율깨나 아는 주인을 만나면 제법 그럴듯한 환대도 받았을 것이고, 또 기막히게 운수대통한 날이면 풍류를 알아주는 어여쁜 기생으로부터 아래위로(?) 극진한 사랑을 받기도 했을 것이다.

풍류호걸 김삿갓 가는 길에 시와 술과 여자도 있었으리니 은근하고 감칠맛 나는 사랑의 시편도 어찌 없었으랴. <기생에게 주다>라는 시에서는 이렇게 읊었다.

- 꽃냄새 파고드는 사내 한밤중에 찾아가니 / 온갖 꽃 짙게 피어도 모두 무정터라 / 홍련을 꺾고 남포로 가니 / 동정호 가을 물결에 작은 배만 놀라네. -

이 시에서‘남포’니 ‘동정호’니 하는 것은 모두 여성의 은밀한 부위를 가리킨다는 사실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김삿갓이 함흥을 거쳐 단천에 갔을 때에 어떤 처녀와 눈이 맞아 3년간 훈장 노릇을 하며 살았다는 설도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김삿갓은 자신이 처자식을 버리고 떠돌아다니는 유부남이라는 점을 밝혔을까 아니면 숨겼을까. 오며가며 짧은 밤을 불태운 떠돌이 사랑이야 풍류가객 김삿갓으로서 한두 번이 아니겠지만 몇 해씩 한 자리에 주저앉아 신장개업(?)을 했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는 것이 필자의 추측이다.

김삿갓의 어머니 함평 이씨는 막내아들과 남편, 맏아들을 차례로 잃고 믿었던 둘째아들마저 집을 떠나 방랑하자 충청도 홍성 땅 결성의 친정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궁벽한 산골에는 김삿갓의 부인 황씨와 아들 ․ 며느리만 남게 되었고, 가장 노릇은 둘째 익균이 맡아서 했다. 심심산중 적막강산에 갇혀 아들 내외와 더불어 화전민으로 연명하며 생과부의 설움을 씹었을 김삿갓의 부인 장수 황씨는 밤이면 밤마다 자신을 버리고 떠나버린 지아비가 얼마나 야속했으며 무섭고 외로웠을까. 하지만 김삿갓은 집에는 돌아올 줄 모르면서 홍성 외가로 돌아간 어머니는 그리웠는지 방랑 중 틈틈이 홍성을 찾아 먼발치로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갔다고 한다.

그동안 양자로 간 학균 대신 집안의 대를 이은 익균이 아비를 찾으려고 여러 차례 집을 나서 풍문이 들려오는 곳마다 쫓아다녔다. 간혹 바람결에 실려 묘향산에서 보았다는 소식도 있고, 또 평양 기생과 살림을 차렸다는 눈에 쌍심지 돋는 소문이 있는가 하면, 영남 땅 어디선가 객사했다는 불길한 소식이 들려오기도 했다. 학균이 한 번은 경상도 안동에서, 한 번은 강원도 평강에서, 또 한 번은 전라도 여산에서 김삿갓을 찾아 집으로 모시고 가려고 했으나 번번이 아들을 속이고 도망치는 바람에 놓치고, 결국은 전라도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시신을 모시고 돌아왔다.

철종 14년(1863년) 3월 29일 57세로 한 많고 파란 많은 이승살이의 막을 내린 김삿갓은 제2의 고향인 영월 노루목에서 외롭고 괴로웠던 유랑의 발길을 멈춘 채 영원한 휴식에 들어갔다. 22세에 방랑길을 떠난 지 35년 만이었다.

왕조 말 어지러운 시대의 그늘에서 좌절과 실의를 딛고 죽을 때까지 외로운 발길을 멈추지 않았던 김삿갓의 방랑 또한 그 나름대로 깨달음에 이르러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구도행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요즘 세상에는 시인이 헤아릴 수 없이 많고, 해마다 수백 권의 시집이 나오지만 참으로 시다운 시는 찾아보기 어렵다. 김삿갓이 비록 생전에 시집 한 권 남긴 적 없지만 수많은 사람이 그의 시를 찾아 읽고 즐기는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그가 이 땅에서 살다간 그 어떤 시인보다도 비상한 시재를 지닌 불세출의 풍류가객이었으며, 보통사람들과 애환을 함께 한 진솔하고 친근한 서민의 벗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가 이미 154년 전에 이승을 떠나고 없지만 아직도 수많은 그의 시와 일화가 우리 곁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다.

끝으로 필자를 김삿갓에게 이끌어주신 고 박영국 선생님을 비롯하여 김삿갓 연구의 선배이셨던 고 정공채 시인과 정대구 시인, 영월의 향토사를 지켜오신 영월문화원 엄흥용 원장님 등 여러분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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